체육관 앞. 돔형 지붕 위로 어슴푸레한 하늘이 점점 옅어져 갔다. 두 사람의 실루엣을 가린 그림자가 점차 고요와 함께 사라졌다. 빛바랜 의자를 삐거덕거리며 유은령은 고개를 숙였다. 시선이 머문 곳은 신발 끝, 그 너머로 그의 그림자가 차가운 시멘트 바닥을 짙게 칠했다.
“나… 피겨 그만두려고.”
은령은 입을 떠난 말이 도무지 낯설었다. 피겨는 자신과 함께였다. 그것을 관둔다면 자신의 일부도 관두는 것이다.
“…….”
정서준의 입이 그 답지 않게 우물거렸다. 은령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친구인 서준조차 관둔다는 그의 말에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사뭇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라도 그 속에 많은 고민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짐작할 뿐.
‘괜찮아 보이려 하지 않아도 되는데.’
정말 괜찮았다면 네가 이 시간에 체육관에서 만나자고 하진 않았겠지. 서준에겐 너무나 간단한 수수께끼였다. 그런 것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는 은령이 느꼈을 무궁한 고뇌를 감히 서준이 헤아릴 수 없을 것 같다는 점.
그것을 증명하듯 은령의 손끝이 떨리길 멈추지 않았다. 한기를 느끼는 자신이 괜히 민망한지 은령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적막의 목소리가 자꾸만 은령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춥지? 이상하리만치 춥지?’ 새벽바람이 자꾸만 은령의 흔들리는 마음을 괴롭게 했다.
“가자.”
서준의 말이었다.
은령은 위로가 필요한 걸까, 아니면 다른 게 필요한 걸까. 서준은 확신하지 못했다. 그가 단 하나 알고 있는 것은 은령을 원래 있는 자리에 되돌려 놓으면 무언가 정리되리란 것이었다.
“갑자기 어딜?”
은령이 긴장감을 애써 감추며 서준을 바라보았다.
“네가 좋아하는 곳.”
그가 가리킨 곳은 체육관의 열린 문 사이. 그 안에서 조용히 빛나는 것은 새파란 빙판이었다. 혹은 은령의 삶이기도 했다.
서준은 그의 등을 떠밀지도, 손을 잡아끌지도 않았다. 어차피 곧 은령은 서준의 뒤를 따를 것이었으니까.
‘넌 항상 내 옆에 있어 주는구나.’
평소와 다름없는 서준의 걸음걸이가 은령에겐 작은 위안이 되었다. 자신의 일부를 내려놓겠단 말을 해도 언제나처럼 있어 주는 그. 은령은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걸었다.
“같이 가.”
“얼른 오셔.”
툭…. 은령은 손을 서준의 어깨에 무심히 얹었다. 지금은 그것 외엔 아무것도 필요치 않았다.
무엇이 그를 두렵게 만들까. 동경하는 친구가 그토록 떨고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서준에게도 괴로운 일이었다. 자신의 일부를 떼어내는 고통을 떠올리면 서준조차 몸서리가 절로 쳐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허공에 홀로 내던져진 느낌일 것이다.
“후우.”
천천히 호흡하며 은령은 피겨화를 신은 발을 빙판 가운데로 미끄러뜨렸다. 그는 휘몰아치는 돌풍이 되기도 하고 설원을 쓰다듬는 산들바람이 되기도 했다. 마치 혼자 내던져져도 상관없다는 듯이.
‘언제나처럼 완벽하네.’
은령은 빙판에서 태어난 것 같았다. 얼음을 낯설어한 적은 한 번도 없던 것처럼 은령은 그 위에서 자유로웠다. 흔들리지도, 미끄러지지도 않는 은령을 서준은 한동안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서준의 위치는 항상 그곳이었다. 그는 늘 이 자유로운 얼음 위의 바람을 지켜보며 응원해 왔다. 은령이 영원처럼 빙판에서 얼어붙는다 해도 서준의 위치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은령에게도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바뀌지 않을 성싶었다.
“음악 필요해?”
서준이 쌀쌀한 손을 비벼 대며 물었다. 텅 빈 체육관을 몇 번 울리던 소리가 은령에게 가 닿았다. 작은 점프 후 빙글빙글 돌던 은령은 멋들어지게 멈추어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에 놓인 스피커로 간 서준이 이것저것 괜찮은 곡을 몇 개 골랐다.
“이거 좋은데.”
“이쪽으로 와!”
은령은 돌연 서준을 불렀다. 볼륨을 조절하던 서준은 은령을 돌아보았다.
“뭐라고?”
“신발 갈아신고 와서 같이 타자!”
여분의 피겨화로 갈아 신으며 서준은 금방 갈게, 대답해 주었다. 평소라면 가만히 구경하고만 있었을 듯했으나, 오늘은 어쩐지 은령을 홀로 빙판에 두어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나저나 되게 빠르네.’
은령은 스핀과 점프를 가볍게 몸을 풀듯이 반복했으나, 그 모습은 프로의 무대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저렇게 빙판과 친한데 어째서 자신의 일부인 피겨를 내려놓으려는 걸까.
그런 궁금증을 품고 있으니 언뜻 능숙해 보이는 은령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그가 승리할 때마다, 혹은 좌절로 몸을 가누지 못할 때마다 보아 왔던 서준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은령의 마음속은 분명 차가운 칼바람이 매섭게 불고 있을 것이었다.
“우왓….”
오랜만에 딛는 빙판은 사뭇 어지러웠다. 단단히 지면을 밟고 칼을 겨누던 펜싱선수 서준에겐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러나 곧 균형을 찾아가며 서준은 은령의 근처에 다다랐다. 그가 손을 잡고 허리를 받쳐 주었다.
“아우, 뭐야. 낯간지럽게.”
“하하. 방금 태어난 기린처럼 오길래.”
“허.”
멋쩍은 듯 서준은 웃었다. 은령의 품에서 달아난 그가 조금씩 균형을 되찾아갔다. 능숙하진 않아도 서준은 빙판과 낯가리진 않았다.
“오랜만인데도 금방 적응하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유은령 연습 상대 해 준 시간이 얼만데. 흉내 정도는-”
“그럼 따라와 봐!”
휙-
은령의 머리칼이 휘날리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은 훌쩍 멀어져 있었다. 서툴게나마 전진하며 서준이 은령을 쫓았다.
뒷짐을 진 채 백워드로 달아나며, 은령은 서준의 맹추격을 여유롭게 구경했다. 벌써부터 땀이 삐질삐질 나기 시작한 서준이지만 지친 기색 없이 은령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리를 더 크게 벌려야 해-! 알레(Allez) 하듯이!”
“그럼 넘어질 텐데?!”
“잘 봐.”
사아악….
크게 미끄러지며 은령은 더 멀리 나아갔다. 서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태까진 최고 속도가 아니었던 건가?
‘게다가 알레 자세도 아니잖아…?’
“서준, 빠른데?”
“못 따라가겠어…!”
“조금 더 힘을 내 봐.”
이미 그러고 있는 듯 전력으로 속도를 내는 서준이었다. 그러나 평지면 모를까, 은령의 영역에서 그를 따라잡기란 무리였다. 억지로 힘을 짜내 보던 서준은 결국 제어할 수 없는 속도에 이르고 말았다.
“괜찮아?”
“읏…. 자, 잠깐만…!”
쏜살처럼 나아가는 서준은, 피겨화의 칼날을 비틀어 보려 했지만 계속 실패했다. 은령이 걱정스러워하며 그에게 다가왔다.
“우와…!”
“에고.”
털썩….
은령은 그를 받아낼 수 있었다. 서준의 몸을 붙든 은령이 다리의 각도를 우아하게 틀어 속도를 점차 줄여 나갔다. 그 순간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오직 바람만이 둘을 감싼 것처럼 느껴졌다.
겹쳐진 둘이 천천히 빙판의 벽으로 미끄러졌다.
“하아. 이렇게 잘하는데 왜 그만두겠다는 거야?”
“으음….”
툭…. 벽에 닿자 둘은 멈추었다. 서준을 놓아준 은령은 어쩐지 침울해 보였다.
“이건 내 전부야.”
From this day on I'm certain I'll never be alone♬
배경음이 순간순간의 정적을 채우고 있었다. 은령은 조심스럽게 단어를 고르는 듯했다. 서준은 재촉하지 않고 그를 기다려 주기로 했다.
“내 전부가… 나를 옥죌 때가 너무 속상해서.”
“…….”
서준도 그 기분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은령이 느낄 압박감을 뭐라 위로할 말이 없었다. 무대의 조명 아래서 칼날을 타고 기술을 만들어 내는 은령은, 수많은 눈동자 안에서 한 치의 실수도 없어야 했다.
그는 연못의 백조다. 우아하게 나아가기 위해선 처절히 발버둥 쳐야 했다. 그러나 그것을 객석 모두가 알아주는 것은 아니지.
“알지.”
둘의 삶은 객석 앞이라는 데서 궤를 함께했다. 은령이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그가 느끼는 것을 서준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저 알아주기만을 바라며 은령은 어렵사리 말을 꺼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객석의 한 자리를 자신이 차지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은령이 포기할 이유는 없을 것이었다.
“그래도 스스로 잃어버린다면 후회하는 것조차 힘들잖아.”
그러곤 둘은 잠시 소리 없이 대화했다. 미동 없이 서로를 도닥였으며, 표현 없이 서로의 감정을 알 수 있었다.
For always, and ever. You'll be a part of me♬
음악에 맞추어 다시 홀로 은령은 움직였다. 정해진 안무를 따라가는 것일 텐데도 그는 마치 악보에서 뛰쳐나온 음표 같았다.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섬세하면서 우아하게. 그러다 휙-
“후….”
은령이 숨을 내뱉자 공중으로 그의 기다란 몸이 뛰어올랐다. 음악과 시간이 천천히 그를 따라 빙판으로 미끄러졌다. 은령이 허락하기 전까지 빙판은 그를 다시 끌어내리지 못할 성싶었다.
‘대단해.’
서준의 눈으로도 세 바퀴 하고도 반 바퀴를 더 도는 회전을 쫓기 버거웠다. 탁…. 안개처럼 피어나는 얼음 조각과 함께 블레이드가 빙면에 닿자 다시 시간은 나아가기 시작했다.
음악이 조용히 끝나고, 은령의 손끝은 동작을 마무리하며 정해진 곳으로 향했다. 격한 점프와 안무 후에도 은령의 자세에서 흐트러짐을 찾기 어려웠다. 흐르는 땀방울만이 그가 뜨겁게 타오르는 심장으로 움직였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었다.
“역시 난 네가 그 위에 있는 게 좋더라.”
And for always and always, we will go on beyond goodbye…♪
가슴이 움찔하는 듯했다. 은령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그마한 꽃이 피었다. 그 꽃은 얼음으로 된 꽃잎이 있고, 그 가운데 찬란히 빛나는 결정은 세상의 없는 빛깔을 하고 있었다. 분광하는 빛 사이로 은령의 기억 속 장면이 하나씩 희끄무레하게 그려졌다.
객석에서 초조한 기대를 보내는 서준, 관객의 박수, 함성, 그리고 빙판의 미세한 수막. 그것이 펼쳐져 이루는 앙증맞은 눈보라. 포디엄 위에서 본, 많은 이들이 보내는 동경의 눈빛. 그리고 또 그 사이에 서 있는 너, 정서준.
체육관을 나서는 서준의 걸음걸이가 다소 불편해 보였다.
“아우, 발 아파.”
추운 곳에서 익숙하지 않은 피겨화로 열이 나도록 쏘다닌 탓이었다. 그런 와중에 은령 홀로 아무렇지 않은 듯 잘만 걸었다. 그는 서준을 재미있게 관찰하다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냥 계속할래.”
서준은 물끄러미 은령을 바라보기만 하고, 특별한 반응은 없었다. 대신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그래. 다음에는 펜싱이야.”
"아, 나도 해야 되는 거야?"
"기브 앤 테이크 몰라?"
체육관 뒤로 태양이 새벽빛을 끌어오고 있었다. 푸르름이 점차 번지는 하늘엔 구름 몇 점이 아침을 깨우려 분주했다.
“있잖아,”
둘은 그저 눈빛을 보내고, 턱을 까닥여 대답할 뿐이었다. 다음 말은 귀로 듣지 않아도 괜찮았다.
이 여름이 끝나도 네 옆에는 내가 있었으면 좋겠어.
ⓒ천니